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쿠보 히로키 (문단 편집) == 선수 생활 == [[파일:external/cdn.mainichi.jp/011.jpg]]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서 주전으로 뛰며 팀을 사상 첫 대학야구 일본제일 팀으로 만들기도 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으로 참여해,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 후, 1993년 역지명 형식[* 과거 NPB에 존재하던 제도로, 선수가 자신이 원하는 팀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었던 제도였다. 다른 지명구단은 본인이 주장으로도 몸담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한다. 입단 직후부터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자질을 인정받았고, 데뷔 해엔 조금 저조한 성적을 찍었지만 서서히 성장해가며 2년차부터 본격적으로 ~~[[비밀번호(스포츠)|비밀번호]]를 열심히 찍고 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주전 2루수로 정착해 주축 타자로 활약했다. 광활한 [[후쿠오카 돔]]을 사용하면서도 1995년도 [[퍼시픽리그]] 홈런왕(28홈런)[* 참고로 이 해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무려 '''타격 6관왕'''(타율, 타점, 득점, 최다안타, 출루율, 도루)을 달성했는데, 고쿠보가 이치로의 25홈런보다 3개 많은 28홈런을 치고 장타율도 다소 높게 나와서 타격 전부문 타이틀 획득을 저지한다. ~~이 해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이치로와 같은 홈런 수를 기록하면서 [[무관의 제왕]] 전설의 한 페이지를 쓴다.~~][* 홈런왕 치곤 30홈런에도 미달했는데, 30홈런 미만의 홈런왕이 나온 건 1961년 [[나가시마 시게오]], [[노무라 카츠야]], 나카타 요시히로(29홈런) 이후 무려 34년 만이었다. 다만 이해 [[퍼시픽 리그]]는 1980년대~2011년 이전을 통틀어 리그 전체 OPS가 6할대에 그친 유일한 해였을 정도로 심한 [[투고타저]]에 빠졌었다. [[스즈키 이치로]]를 제외하면 3할 타자가 불과 3명에 그중 .310을 넘긴 타자는 단 1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타점왕은 고작 80타점에 이치로를 포함해 무려 3명이나 나왔을 정도.][* 참고로 이해 3루타도 9개로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 3루타+홈런왕 공동 1위는 단일리그 시절인 1947년의 [[오오시타 히로시]] 이래 무려 48년 만으로 양대리그 최초 기록이었다.] 1997년 [[퍼시픽리그]] 타점왕(114타점)을 수상했을 정도로 호쾌한 장타가 매력이었던 선수였다. [[쿠도 키미야스]], [[아키야마 코지]], [[조지마 겐지]] 등과 함께 다이에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면서 1999년 [[일본시리즈]] 우승, 2000년 리그 연패에 공헌하는 등 호크스의 암흑기 탈출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그렇게 2001년 44홈런 123타점[* 이 정도 기록이면 홈런+타점왕은 따놓았겠지만.. 이때는 NPB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이었고 하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특유의 '''이테마에(쳐부숴라) 타선'''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때라, 당시 킨테츠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던 [[터피 로즈]](홈런왕, 55홈런)와 나카무라 노리히로(타점왕, 132타점)에게 홈런, 타점왕 타이틀을 내줘야 했다. 그밖에 NPB데뷔하여 49홈런 124타점을 기록한 알렉스 카브레라도 있었다.~~팀도 리그 3연패를 놓친 건 덤이다~~], 2002년에도 32홈런을 치는 등 중심타자로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나, 2003년 시범경기에서 부상[* 홈플레이트 접전 도중 상대팀 포수와 충돌하며 무릎 전방 십자 인대 파열+내측 인대 손상+외부 반월판 연골 손상+경골 과 대퇴골 타박상 등 완치까지 최소 6개월이 필요한 중상을 입었다.]을 입게 되어 한 시즌을 날리게 된다. 고쿠보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구치 타다히토]], [[마쓰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인방"'''으로 대표되는 다이에의 일명 '''다이하드 타선'''은 쉴새없이 불을 뿜었고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호화 투수진의 활약이 더해진 다이에는 [[한신 타이거즈]]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2003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이 해 고쿠보의 부상으로 인한 [[3루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콜업된 선수가 [[가와사키 무네노리]]다.]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이 핵타선에 고쿠보까지 부상에서 돌아온다면 다이에 타선은 내년에도 최강이다!'''라고 예상했으나... 200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무보상 [[트레이드]]''' 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부상 치료비 지급을 둘러싼 구단과의 트러블이 원인이었다고 하는데, 이전까지 팀의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선수단의 리더였던 고쿠보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게 된 선수단과 팬들은 당연히 [[멘붕]]에 빠졌고, 선수단은 항의의 의미로 이해 시즌 종료 후 예정되었던 우승 여행을 [[보이콧]]하며 고쿠보를 그따위 방식으로 허무하게 방출시킨 구단을 거세게 비난하였다.[* 당시 고쿠보 대신으로 4번 타자를 맡았던 [[마쓰나카 노부히코]]는 '''"구단에 "웃기지 마!!" 라고 말하고 싶다. 어째서 고쿠보 씨를 그렇게 공짜로 [[교진군|교진]]에 넘겨버린단 말인가?! 열심히 한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방출했다면 다른 선수들도 (고쿠보 씨와)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이 구단(다이에)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나 보다. (이 구단은 이제) 끝장이다. 팬들에겐 죄송하지만 내년에 리그 연패를 하겠다는 의지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라고 말하며 구단을 거세게 비난했고, 이해 긴 부상을 이겨내고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사와무라상]] 수상 투수 [[사이토 카즈미]]도 '''"지금은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트레이드를 한 다이에 구단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본 제일의 구단이 할 짓이 아닙니다. 선수를 모욕하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구단 비난에 동조했을 정도다. 그런데 결국 마츠나카의 말처럼 이듬해인 2004년, 다이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 달성에 성공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 리그 연패에 실패했고, 이해 시즌 종료 후 다이에 구단은 [[소프트뱅크]]에 매각된다.] 트레이드 자체는 고쿠보가 먼저 요구했다고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이에는 경영난으로 인해 2004년 시즌 종료 후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호크스 구단을 인수하게 된다.] 이 무상 트레이드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있었으나, 고쿠보의 자서전이 출판되고 나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다. 트레이드를 원한 것은 본인으로, 단순히 수술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 호크스의 운영진들은 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도 화류계 여성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경기가 끝난 다음 수훈선수와 그런 여성들이 사진을 찍도록 하는 등 구단 운영이 막장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수의 성적이 아닌, 선수 굿즈 판매실적을 연봉협상에 반영하겠다는 등 도를 넘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고 고쿠보는 이런 것들에 지속적으로 항의하는 입장이었다.[* 위에 나와 있듯이 호크스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1998년 이후(사실 이미 몰락의 조짐은 보였지만) 다이에는 자신들의 전성기를 만든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해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당연히 [[후쿠오카 돔]]을 자비로 짓기까지 한 다이에의 전성기에 비해(팀은 암흑기였지만) 구단에 대한 지원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어 저런 막장짓을 할 정도로 구단 자금사정이 악화된 것.] 이후 고쿠보가 2003년 큰 부상을 당하고 나서 수술을 미국에서 하겠다고 추진했으나 구단 측에서 돈이 많이 든다며 취소했고, 이게 고쿠보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을 끊는 계기가 되어 타팀으로 이적을 요청하게 된다. 호크스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는 입장이었으며 딱히 요미우리 이적을 요청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와 요미우리간에 어떤 계약이 있었는지도 본인은 알지 못 한다고 한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7f506cce.jpg]] 우여곡절 끝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고쿠보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2004년에는 '''요미우리 우타자로는 사상 최초로 40홈런을 돌파'''(41홈런)하며 [[컴백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리더십을 인정받아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의 주장에 선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승엽]]에게 4번타자 자리 빼앗긴건 함정-- 요미우리의 지독한 순혈주의를 생각하면 대단히 이례적인 사례. 다만 그 시절 요미우리는 막장 감독 [[호리우치 츠네오]] 아래에서 구단 사상 초유의 암흑기(래봐야 2년 연속 B클래스이지만)를 겪던 때라 고쿠보의 활약이 다소 빛바랜 감은 있다. [[파일:external/athlete-maniax.blog.so-net.ne.jp/E5B08FE4B985E4BF9DE8A395E7B480.jpg]] 2006년 시즌 종료 후 [[FA 제도|FA]]자격을 취득했고, 친정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금의환향]]해 은퇴할 때까지 뛰었다. 복귀의 가장 큰 이유는 오 사다하루 감독을 행가레 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클린업 트리오]]의 일각으로 활약했으며, 2011년에는 40세의 나이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 고쿠보 이전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 기록은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아키야마 코지]]였다. 2011년 아키야마는 소프트뱅크의 감독.] [[파일:external/hwd.heteml.jp/20120625_31695.jpg]] (선수 마지막 해인 2012년 2000안타를 돌파한 모습) 2012년 '''통산 2,041안타, 413홈런'''의 대기록을 세운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러나 정작 은퇴경기가 됐던 2012년 정규시즌 마지막 홈 경기인 10월 8일 경기에 팀은 상대팀 투수인 [[오릭스 버팔로즈]]의 [[니시 유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헌납했다. 고쿠보 본인이 선수생활 하는 동안 처음으로 경험하는 노히트 노런 경기였다고(...). 심지어 이 날은 본인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퇴 선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